2전시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 조선 후기
- 41.2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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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박물관 / 복제
1588년(선조 21)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은 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사면을 받았다.
그림 아래 좌목(座目)에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右火烈將 及第 李舜臣)“이 보인다.
1587년 녹둔도 사건으로 이순신은 이 일로 함경북병사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588년 1월 여진족의 거점인 시전부락을 토벌하는 전투에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복권되었고, 아산의 본가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백의종군이란 우리가 요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죄를 범한 무장에게 가했던 처벌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가장 중형이 처형이었고, 그 아래로는 귀양을 보내는 유배가 있고, 그보다 약한 처벌은 파면이었다.
백의 종군은 파면보다 더 약한 아주 가벼운 처벌로서 요즘 말로 하자면 ‘보직 해임‘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으면 흰옷을 입고 자신이 근무하는 곳에서 계속 근무해야 했는데, 실제 사례를 고찰해 보면, 보직을 해임당한 상태로 흰옷을 입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직을 그대로 지니고 근무하면서 옷만 백의를 입게 하는 사례도 있는 등 일종의 ‘정서적 처벌’로 활용되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그 사람의 신분과 위계를 표시하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관리로서 관복이 아닌 ‘백의‘를 입고 집무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충분한 징계 효과가 있는 처벌 방식이었다.
훗날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이 삼도통제사에서 해임된 후 백의종군하는 동안 자신의 종을 거느리고 다니고, 군관이 배속되며 그가 묵는 곳에 각급 관리들이 와서 현안을 보고하고, 노마료(奴馬料 : 종과 말을 거두는 데 드는 비용, 일종의 급료)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송우혜, 2004. 4. 28.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학술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