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묘소
이순신 장군은 전사 후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에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 아산의 금성산에 모셔졌다. 그리고 전사 16년 뒤인 1614년(광해 6년)에 지금의 어라산에 이장되었다. 묘소는 부인 상주방씨와 합장묘로서 조선시대 고관묘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1970년대 성역화사업 당시 왕릉과 같이 곡장이 둘러졌다.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이 죽었을 때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그의 사적(事蹟), 즉 생애를 새겨 넣은 비로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워졌다. 묘소 입구에 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외손자 홍우기가 효종 때 영의정 김육에게 청하여 비문을 지어 만든 것으로 비석에 글 새기는 것은 1660년(현종 1)에 완성되었는데 후손들이 힘이 없어 34년 만인 1693년(숙종 19)에 비로소 세웠다고 적고 있다. 비문 첫 머리에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가 나온다. 김육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인데, "도원수의 무덤에는 큰 비석이 있지만 통제사의 무덤에는 아직도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 없어 여러 선비들이 유감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봉분 동남쪽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정조가 친히 글을 내려서 만든 것이다.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정이 깊었던 군주로 이 비문에서도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를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고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빗머리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충의를 드높이고 무용을 드러내는 비)" 여섯 글자가 전서체로 쓰여 있는 이 비는 정조 임금이 이순신 장군에게 최고직인 영의정을 증직한 후인 1794년에 완성되었다. 그래서 "어제(御製)"라고 하여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내린 것임을 표시하고 그 아래에 "有明水軍都督朝鮮國 贈效忠仗義適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이라는 조선왕조에서 내린 최후,최고의 직위를 모두 53자에 걸쳐 적고 있다. 이 비를 만들 때 이순신 장군의 후손을 불러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고, 비가 완성된 후에는 탑본을 떠서 4대사고(史庫)와 관각(館閣=규장각), 태학(太學=성균관)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김육이 쓴 신도비는 거북 형상의 받침돌에 비석 머리에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은 고려 이전 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해 정조 어제 신도비는 상석(床石) 받침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비석양식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