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1930년대 초 이충무공이 잠든 묘소가 곤경에 처했다. 당시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이충무공묘소와 위토(제사와 관련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가 일본은행에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갈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2천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라는 제목의 기사와 다음날 실린 민족지사 정인보의 “민족적 수치”라는 사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정인보는 사설을 통해 “어찌 충무공의 분묘를 위함뿐이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길질할 필요가 있다”라며 온 겨레가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국내․외의 수 많은 민중들이 뜨겁게 호응하여 1932년 3월까지 약 2만여명의 사람들과 4백여 단체가 성금모금에 동참하여 1만6천21원30전의 민족성금이 모금되었고 성금과 함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각계각층의 애절한 편지글들이 전달되었다.
이러한 민족성금 모금을 계기로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모든 채무를 변제하고 이충무공의 유적과 유물을 온전히 보호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현충사를 새로이 중건하는 사업에 착수하여 1932년 6월 5일에 전국 각지에서 약 3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과 영정 봉안식이 개최되었고 올해(2022년)가 그 중건의 9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가 된다.